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의 여진 정벌 (문단 편집) == 제1차 여진 정벌(숙종 시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12EN7ExdXyE)]}}} || 이들간의 갈등은 애꿎은 고려에게로 불똥이 튀는데, [[숙종(고려)|숙종]] 9년(1104년) 1월에 동여진 사람 1753명이 귀부해왔고 이와 동시에 완안부 추장 오아속(烏雅束)이 여진의 또다른 부족장인 부내로(夫乃老)와의 갈등으로 인해 부내로를 쫒아 기병을 이끌고 정주성까지 진격해 진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고려는 변방의 장수 이일숙(李日肅)이 여진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불러 잔치를 벌이며 물어본 결과 완안부의 진짜 목적은 고려 침공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급히 허정과 나불을 감금하고 이 소식을 개경에 알렸다. 완안부가 침공할 것이라는 급보를 전해들은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였던 임간(林幹)에게 [[부월]]을 하사하며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정주성으로 보내 대비토록 함과 동시에 여진족이 오고가는 마천령 일대에서 차차 점령해 남하해오는 완안부를 토벌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임간은 공에 눈이 먼 나머지 오아속의 완안군을 자기 마음대로 선제 공격했고, 오히려 완안부의 석적환에게 크게 패하며[* 이때 크게 밀리던 상황에서 지휘관인 임간의 앞에 품계도 없는 무관이 와서 다짜고짜 "말 한마리와 칼을 주시오"라고 요구하자 결국 내어 주었는데, 이 무관이 말을 타고 적진으로 달려가고 여진 병사 두 명의 수급을 베어왔다고 한다. 이 무관이 바로 고려의 인간 흉기로 불리는 [[척준경]]이다.] 조정에서 그들의 패전을 물어 파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임간이 공을 세우려고 교련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 7, 숙종 9년 2월.}}} 임간의 참패에 고려는 급히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하며 정주성에 위치한 완안부를 치게 했다. 벽등수(闢登水)에서 마주친 고려군과 완안군은 소규모 결전을 치뤘으나 고려의 패배로 끝났고[* 고려사에는 여진족 30명의 목을 베었으나, 아군의 사상자 및 실종자 수가 전체 병력의 절반이 넘었다고 두리뭉술하게 표현했으나 [[금사]]에서는 "우리 장수였던 석적환이 고려군 500명과 벽등수에서 마주쳤는데 개털어버렸음"이라고 기록했다.] 승리를 거둔 완안부는 일대를 약탈한 후 유유히 돌아가버린다. 결국 완안부가 1104년 6월에 형식상으로 사절단 68명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청했고, 고려는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고려에 귀화했던 (친고려파) 6명의 추장을 포함한 14명을 돌려보내주면서 당장의 갈등은 어찌어찌 봉합하였다. 그러나 선제 공격을 하고도, 이전까지 자신들의 제후국이자 야인 정도로만 여기던 여진 무리 따위에게 어이없이 깨진 충격은 컸다. 숙종은 이때의 패배에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천지신명이시여. 만약 저들을 치게 되면 그 땅에다 사원을 짓겠습니다"라고 할 정도였고 당시 수도 천도의 실패[* 왕권 강화를 위해 재위 원년부터 [[남경(고려)|남경]]으로의 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나 기득권 세력이었던 [[문벌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실패했다.] 이후 자신의 분노를 [[여진정벌]]에 쏟아 부었다고 할 정도로 전쟁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임금이 분노하여 천지신명에 고하니, 음덕을 빌려 적경을 소탕해 그 땅에 절을 짓겠다고 하였다. >王發憤告天地神明, 願借陰扶 掃蕩賊境 仍許其地創佛宇.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던 제후 부족들 정도로만 생각했던 여진족의 군사력이 완안부를 중심으로 강성해진 것을 알게된 고려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윤관]]은 이 패배를 바탕으로 "고려는 [[기병]]을 상대로 불리한, 수성 중심의 보병 편제로 이루어져있는 것이 문제다."라며 이전까지는 없었던 '''국민의 직위에 상관없이 차출하며, 능력 위주의 부대를 만들자'''는 건의를 하게되고 숙종이 승인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별무반]]이다. >"신이 적세를 보니 아주 강해 측정하기 힘드니, 쉬면서 생도와 병사를 길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신이 보기에 패인은 적은 기병인데 우린 보병이니, 상대가 되기 어렵습니다."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열전 윤관조.}}} 별무반은 매우 강력한 군기와 군법을 적용했고 이들의 수는 무려 17만 8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숙종은 여진 정벌을 보지 못하고 [[서경(고려)|서경]] 순시 이후 돌아오던 중 세상을 떠났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게 된다. 별무반은 그대로 유지하고, 1105년 11월에 동북면 방향에 지형 정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정벌이 숙원 사업이었던 숙종과는 달리 예종은 내치와 왕권 강화에 힘을 쏟게 된다. 또한 1106년 3월에는 동여진 추장이 화친을 청하며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자, 예종은 그곳에 파견했던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 김덕진(金德珍)과 부사(副使) 임신행(任申幸)를 개경으로 복귀시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